[전남자치일보/전영태 기자] 보길도는 윤선도의 유적이 많은 곳이며, 보길도의 동쪽 끝자락 백도리의 해안 절벽에는 윤선도와 동시대를 살아간 송시열의 글씨가 남겨져 있습니다.
송시열은 서인, 윤선도는 남인을 대표하며 조선 중기 치열한 당쟁의 격론 속에서 송시열의 탄핵으로 윤선도가 유배를 떠났을 정도로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정적이었습니다.
탐라로 유배를 가던 윤선도가 풍랑으로 잠시 머무른 보길도의 모습에 매료되어 세연정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역시 송시열은 노구를 이끌고 탐라로 유배를 가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며칠 머물러 있는 동안 자신의 심정을 읊은 시를 절벽에 남겼습니다.
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팔십삼 세 늙은 몸이 거친 만릿길을 가노라. 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만 궁하구나. 북극공담일 남명단신풍,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끝없이 넓은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초구구은재 감격읍고재, 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 은혜 서려 있어 감격하여 외로이 눈물 흘리네.
세월이 흘러 글씨를 분별하기 쉽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송시열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송시열은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재기를 모색하며 제주도에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 도착했을 때 사사하라는 어명과 함께 사약을 든 사홍관이 도착하여 수제자 권상하가 손을 잡아주는 가운데 송시열은 사약을 마시고 객지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송시열은 왕세자 책봉 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 유배 후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 전북 정읍에서 사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보길도에 남긴 글씨가 송시열의 생애 마지막 글씨가 되었습니다.
윤선도가 세상을 떠난 지 18년 후인 1689년.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풍랑으로 보길도에 기착한 후 송시열은 자기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왕을 그리워하며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보길도 끝 암벽에 새겨놓았습니다. 남인과 서인의 영수로 대결하던 두 거물이 보길도에서 남긴 흔적을 보면서 권력과 풍류, 인생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저작권자 ⓒ 전남자치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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